고 정성균 목사 약력
고 정성균선교사는 1944년 5월 1일 전남 고흥 거금도 오천 섬마을에서 태어나 11살 때 갑자기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과 함께 여수로 나와 남산동에 살면서 여수서국민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57년 어느 날 여수중앙교회 장애순 여전도사의 전도를 받고 가족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정성균 선교사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958년 여수중앙교회에서 운영하는 여수염광중학교에 입학, 3학년 때부터 목사가 되는 꿈을 꾸며, 성도들의 도움으로 여수공업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여수중앙교회 학생회장과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였습니다.
1964년 대전대학교 성문학과에 지망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박정식 변희관 선배와 더불어 마암리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장래 선교사의 character building 작업이 시작되었고 1967년 대전대학 내에서 K.S.C.M 첫 민선회장이 되어 선교와 기도, 봉사활동을 펼치며 세계를 품는 기도운동에 앞장서며 변희관 이순정 김상중 손순우 윤만서 최기만 임평수 등과 함께 세계선교동지회를 구성하여 농어촌순회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1971년 군복무를 마친 정성균 선교사는 임평수 씨와의 결혼 약속까지도 함께 희생하고 순교하자고 한다. 같은 해 꿈에도 그리던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매일 밤마다 두 시간씩 아차산에 올라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게 해 달라고기도하며, 장신대 3년 내내 이제는 우리 민족도 이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1974년 장신대를 졸업한 정선교사는 총회 파송선교사가 아닌 Faith mission 정성균으로서 장신대 67기 생 중심으로 선교후원회을 조직한다. 그리고 선교의 길을 찾던 중 광주기독병원 카딩톤 의료선교사와의 극적인 만남으로 방글라데시 선교지로 떠나게 된다.
1974년 8월 7일 정성균 선교사 부부는 두 살이 갓 넘은 딸 조희와 8개월 된 아들 은석이를 등에 업은 채 카딩톤 일행과 함께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 선교지로 떠난다. 이 무렵...서울에서는 EXPLO-74가 한창 열렸습니다
1974년 8월 27일 정성균 선교사 일행은 김포공항을 떠난 지 20일 만에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공항에 도착한다.
1974~1979까지 5년간 인구 8,000만명의 85%가 문맹인에 회교도들로 강력한 회교국가 방글라데시의 모습은 가난과 질병과 죽음으로 가득찬 전쟁의 폐허지 그리고 홍수로 뒤덮힌 땅 방글라데시 이 참담한 현실을 바라본 정성균 선교사는 공항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주님 감사합니다. ! 이 방글라데시를 제게 주십시오 지옥을 연상케 하는 이 나라 이 민족에게 복음의 빚, 사랑의 빚을 갚기를 원합니다. 순교의 제물이 되기에 가장 적합합니다. 저를 당신이 쓰실 그릇으로 드립니다.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며 흥분한 한국의 가난한 선교사 정성균 !
그러나 주머니에는 단 돈 천 달러도 없이 이 나라에 와서 선교하겠다는 실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신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그저 암담하기만 했다.
정성균 선교사는 7개월 간 혹독한 언어훈련 후 6개월 간 통기 난민촌 결핵진료소 카딩톤 의료선교사를 협력하면서 진료소 직원들을 상대로 성경공부를 가르치며 주말이면 이들과 함께 난민촌 거리전도를 한다.
1975년 일시 귀국해 10월 17일 목사안수(순천노회)를 받은 후 공식적인 총회 파송선교사가 된다. 그리고 장신대 선교사파송연구회를 찾아 방글라데시 선교보고를한 후 방글라데시로 향한다.
오직 다카시의 복음화를 위한 열정과 의지로 현지 마을 주민들에게 땅을 희사케 하여 데무라, 바따라, 색디 등 학교를 세워 어린이들에게 벵갈어를 가르친다.
그리고 다카시민교회, 바따라교회,색디교회,데무라교회 등 주일날에는 학교 교실을 예배당으로 전용하여 옥토 같은 그들의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을 심어간다.
정성균 선교사부부는 방글라데시 선교 5년 내내 정치적 악조건 속에서의 불안함과 생활비가 모자라 굶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는 서러움을 달래며, 작렬하는 태양과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을 걸으며 복음을 전하다가 수많은 모슬렘 폭도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여섯 개의 초등학교를 세워 공부시키는 600여명의 학생들 그 학교들 안에 세워진 교회마다
모이는 청ㆍ장년 성도들, 각 학교와 교회에 파송되는 유급교사와 전도사들, 주말성서학원생들 등 모두 700여명에 달하는 어린양들을 돌보느라 정신도,육체도 몹시 지쳐만 갔습니다.
1978년 정운상 목사를 초청해 부흥회와 세례식을 거행한 후 한 주간동안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오는데 정운상 목사는 몹시 지쳐있는 정성균 선교사를 바라보고 그의 안식년을 생각한다. 정성균 선교사는 1979년 2월 전주 예수병원에서 파송해 온 의료선교사 이용웅 박사 부부에게 모든 선교사역을 맡기고 1979년 7월 고국에 들러 한 달 반 동안 16개 선교후원 교회와 8개 기관단체를 방문하며 선교보고와 설교, 간증을 하며 개인적으로 27명을 만나면서 한국에서의 안식년은 안.쉴.년이 된다.
1979년 8월 23일 정성균 선교사는 미국으로 향한다. 뉴져지주 벤트너시티 해외선교연구원 세계 제일의 휴양시설에서 10개월간 선교학을 전공하며 안식년을 지내는 중 미국 전역을 오가며 한인교회 22회, 부흥집회 21회,미국교회 3회 등 간증집회와 선교후원금 11,599달러를 모금하면서 미국에서의 안식년도 안.쉴.년으로 몸은 지쳐만 갔습니다.
1980년 7월 17일 한국에 돌아온 정성균 선교사는 때마침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80세계복음화대성회에 참가하여 설교 통역자와 대학생부 강사로 봉사한다.
성회 마지막 날 오후 정성균 선교사의 “복음에 빚 진자”의 메시지를 들은 일만 여명의 젊은이들이 은혜가 충만하여 너도나도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1980년 9월 18일 안식년 일정을 모두 마친 정성균 선교사는 방글라데시에 도착하였으나, 방글라데시 정부의 재입국 거절로 정성균 선교사는 제2선교지 파키스탄으로 향한다. 1980년 10월 13일 카라치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파키스탄은 인구 7,800만 명의 강력한 회교정권 모슬렘국가.
히말라야 산맥 머리 랭귀지 스쿨에서 파키스탄 언어공부를 한 후 꾸즈란왈라신학교에서 무보수 교수로 봉사하며 파키스탄 선교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에서 보내온 선교후원금으로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현지인 교계 지도자들의 영적훈련으로 침체된 파키스탄 교회를 재건케 하고,14개 처의 개척교회와 2개 처의 국민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1982.8.17~9. 11까지 파키스탄 교회 지도자들을 인솔하여 한국에 들어와 한국교회의 부흥상과 신앙적 열기를 체험케 한다. 정성균 선교사는 이들을 먼저 보내고 쇠약한 몸으로 한국에 남아 17개 후원교회와 9개 기관의 초청을 받아 설교와 간증을 하던 중 믿음의 고향 여수중앙교회를 방문하여 1982. 9. 19. 정성균 선교사는 주일예배시간에 ‘복음에 빚 진자’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어린 시절 중앙교우들의 사랑을 회상하며 감격의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파키스탄 선교현지로 떠난다. 파키스탄 주재 한인들의 신앙생활을 돌보면서 계속되는 신학교에서의 강의와 숨 막히는 무더위와, 파국교회 지도자들의 분열과 분쟁을 막으려는 시달림 속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느라 몸도 마음도 기진맥진해져 갔습니다.
결국... 정성균 선교사는 1984년 6월 씨알콧장로교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7월 오재희 한국대사의 주선으로 라왈핀디 육군통합병원에 입원하여 급성간염(B형간염) 치료를 받던 중 하나님 앞에 엎드려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제 생명을 원하신다면 저는 이제 드릴 것이 이것밖에 없사오니 내 생명을 받아주소서. 제가 못다 이룬 주님의 일을 제 아내가 이루게 해 주시고,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주께 받은 선교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기도하다 잠들던...
1984년 7월 17일 밤 11시 경 정성균 선교사는 4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복음의 감격 때문에 빚진 자 되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의 삶을 살아온 정성균의 호홉을 40년 만에 멈추게 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빠의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와 울부짖던 어린 딸 조희와 아들 은석, 의석 3남매를 끌어안은 채 울다가또 울다가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임평수 사모님은 남편의 유언을 따라 파키스탄 선교를 기필코 계승하리라 각오합니다.
방파선교회는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에 선교를 나간 정성균 선교사를 후원하면서 1975년 조직한 선교단체로, 정 선교사의 사역지가 방글라데시에서 파키스탄으로 확장되어 양국의 첫글자인 '방'과 '파'를 따서 한문으로는 '세계 방방곡곡에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의미의 '나라 방(邦)', '뿌릴 파(播)'를 사용해 '방파'라는 이름으로 개명, 지금까지 선교회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방파선교회를 통한 교회사역으로는 400여 교회의 4만여 명이 목양되고 있으며, 유치원과 초중고, 대학, 신학교, 간호학교, 선교센터 등 36곳의 학생 4000명을 대상으로 하며 장학사역과 사회복지, 구제사역, 축구팀육성, 병원선 사역 등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 임 선교사는 2000년 성경번역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재파송을 받아 인도네시아에서 부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선교사님의 발자취를 따라 선교여행을 하고 싶습니다.